Program Introduction

점과 선 시즌 2-9: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나의 사랑이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보다 이 밤을 더 아름답게 비추어 -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over the Rhone by Vincent van Gogh 1888
“나의 사랑이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보다 이 밤을 더 아름답게 번쩍이며 비추어” (3막 2장 – 라이샌더)

슈베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Franz Peter Schubert(1797-1828): Fantasie in C major, D.934 (26 mins. / 1827)

I. Andante molto
II. Allegretto
III. Andantino
IV. Allegro vivace – Allegretto – Presto

이 곡이 초연된 1828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 평론가는 초연 무대를 두고 “비엔나 사람들이 지적 추구에 바칠 수 있는 시간을 초과하는 길이의 작품이다. 공연장은 차츰 비워졌다. 작곡가 본인도 곡의 마무리에 대해 할 말이 없음을 실토해야 한다.”라고 썼다. 이 환상곡의 자유로운 형식은 3부 소나타 형식에 익숙해있던 당대의 청취자들에게 지나치게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또는 악평의 책임을 줄이려는 의도였는지 위의 평을 썼던 이는 자신도 마지막 악장까지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슈베르트는 제시-발전-재현이라는 변증법적 소나타 형식에서 벗어나 ‘선율-주제’란 덩어리를 연속으로 배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3악장 안단티노의 주로 쓰인 선율은 뤼케르트 시에 붙인 가곡 ‘내 인사를 받아주오’ D 741에서 가져온 것이다. 인사를 받아줘야 하는 ‘그대’는 더 이상 마주 앉아 얘기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존재다. 그런 까닭에 이 부분은 기묘하고 마법적인 감정의 상태에서 노래해야 하는데 주제가 여러 개의 변주로 확장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도 고조된다.

환상곡 D 934를 작곡했을 당시의 슈베르트 Franz Schubert Portrait by Gabor Melegh(1827)

전체적으로는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전형적인 4악장 소나타 형식이나 안단테 몰토의 1악장과 알레그레토의 2악장을 한 악장으로 간주해 전체를 3악장 구조로 파악하기도 한다. 실제 연주는 악장 간의 쉼 없이 한 번에 진행된다. 귀 기울여 들으면 이 소나타엔 매우 많은 음이 등장하는 것을, 두 연주자 모두에게 엄청난 기교가 요청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편하게 들린다면 연주자의 기량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것이다.

초연은 만족스럽지 못했어도 근 200년이 흐른 지금, 슈베르트의 환상곡은 주요 바이올린 레퍼토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음악의 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통찰력과 함께 명석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청중의 환상곡의 황홀한 감정으로 인도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음악 언어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매력적이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여도 그 속엔 측정할 수 없는 감정적 깊이가 있다. 이 환상곡의 정서는 슈베르트 가곡에서 자주 접하는 슬픔, 고통, 사색이 아니라 은은한 빛으로 발하는 낙관적 태도이다. 단순한 표면 아래 자리한 매우 복잡한 내면의 삶을 연주자는 포착해내야 한다. “간단한” 음악처럼 보이지만 정작 연주자들은 매우 높은 연주 기술의 소유자여야 한다. 쇼팽이 제 2의 파가니니라 칭했을 정도로 기교가 뛰어났던 요제프 슬라빅을 염두에 두고 이 곡이 씌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피아노 부분도 못지 않은 고난도임을 거장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말로 확인할 수 있다. “피아노를 위해 쓰여진 음악 중 가장 어렵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한데 모아놓은 것보다 더 어렵다고요.”

슈만(편곡: 크라이슬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Robert Schumann(1810-1856): Phantasie in C major, Op. 131 arranged for violin and piano by Fritz Kreisler (15 mins. / 1853 / dedicated to Joseph Joachim)

이 곡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음악으로 쓴 러브레터이다. 슈만의 원곡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은 크라이슬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인 슈만이지만 바이올린을 위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잊혀졌거나 심지어 작곡가 자신에 의해서 조차 무시되었다.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된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출판된 것도 그의 증손녀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은 생전에 출판되기 했어도 오늘날까지 콘서트 프로그램에 잘 오르지 않는다. 녹음도 드문 편으로 그나마 크라이슬러에 의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버전이 좀 눈에 띌 뿐 오케스트라 버전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이 환상곡은 요아힘의 의뢰에 따라 만들어졌다. 초연은 슈만의 지휘와 요아힘의 연주로 1853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이듬해 1월, 요아힘은 다시 이 곡을 연주했고 같은 연주회에서 클라라 슈만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연주했다. 아마도 슈만이 절친 바이올리니스트와 아내의 연주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을 것이다.

환상곡은 고전주의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곡가들이 즐겨 선택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전형적 악곡 스타일이었으며 슈만이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기도 했다. 이 환상곡은 일정 부분 소나타의 원리를 따라 A단조의 애절한 도입부로 시작해 바로 C장조의 명쾌한 주제가 나오고 이후 작품의 나머지 부분에 걸쳐 후렴처럼 반복된 후 종지부로 나아간다.

이 곡이 무시됐던 이유 중 하나는 슈만 말년의 작품들이 받았던 오해, 즉 작곡가의 정신적인 문제가 작품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 곡을 편곡한 이가 탁월한 선곡과 빼어난 작, 편곡 능력으로 수많은 명작을 남긴 크라이슬러였다는 점은 오해의 근거를 희박하게 한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를 경험할 때 오해는 쉽게 불식된다. 

왁스만: 카르멘 환상곡

Franz Waxman(1906-1967): Carmen Fantasy (9 mins. / 1946 / dedicated to Jascha Heifetz)

1919년 ‘코스모폴리탄’지에 패니 허스트가 쓴 <유모레스크: 눈물을 머금고 짓는 웃음의 인생>이란 제목의 단편 소설이 실렸다. 짧게 플롯을 소개한다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걷는 젊은이와 세 번의 결혼에도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는 부인이 주인공으로, 우연한 기회에 만난 이들은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짐작하겠지만 해피 엔딩은 아니다. 열정, 갈등, 저항, 위로가 뒤섞이다 파국의 종말을 맞는 격정의 멜로드라마다. 큰 인기를 얻은 소설은 이듬해 무성영화로 만들어졌으며 26년이 흐른 후 여전히 흑백이긴 하나 멋진 음악과 함께 리메이크되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높은 찬사를 받았다. 헬렌 라이트 부인 역을 맡은 조앤 크로포드가 아름다운 외모와 깊은 감정 연기로 주목을 받았고 탄식과 절망의 비가를 유모레스크(유모레스크는 낭만주의의 한복판이었던 19세기에 널리 보급된 유머러스하면서도 극적인 감정 변화가 특징인 기악곡 형식이다. 슈만도 ‘웃음보다는 오히려 눈물겨운 곡’이라 했으니 유머에 방점을 두기 보다는 해학을 곁들인 비극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란 역설로 풀어낸 원작과 연출도 평단의 호평을 끌어냈다. 연기, 연출 못지 않게 이 영화를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음악이다. 장본인은 음악감독 겸 작곡을 맡은 프란츠 왁스만이었다.

왁스만은 150편이 넘는 영화의 스코어를 작곡하며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계에서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영화 <유모레스크>에는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로부터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까지 스무 곡 넘는 명곡이 등장한다. 스튜디오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원작들을 연주하는 것과 함께 왁스만은 비제와 바그너의 테마를 바탕으로 오리지널을 만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남자 주인공의 천재성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엄청난 기교를 얹은 곡들이었다. 당초에는 콘서트, 방송, 영화를 주름잡던 당대의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으나 실제 연주는 아직 무명이었던 아이작 스턴이 맡았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영화평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음악은 실로 대단하다. 눈을 감고 가필드(극중 남주인공 폴 보레이를 연기)의 연주 장면을 듣는다면 훨씬 깊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클로즈업 장면에 나오는 손은 그의 것이 아니다. 실제 그 손가락은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전문 바이올리니스트의 것이다. 매우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연주다.” 사라사테 버전이 아닌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은 이렇게 탄생했다.

프란츠 왁스만 Franz Waxman

나중에 영화를 본 하이페츠는 ‘카르멘 환상곡’을 라디오 연주회용으로 편곡을 해 달라고 왁스만에게 부탁했다. 오케스트라 파트가 확장된 작품의 초연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하이페츠는 이 곡으로 세계 투어를 했고 녹음까지 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당시 제자였던 레오니드 코간에게 이 레코드를 전했다. 큰 감동을 받고 연주까지 하고 싶었던 그는 냉전 상황에서 악보를 구할 수 없자 음반을 들으며 일일이 채보했다. 문화 부문에서나마 미국과 소련이 조금씩 교류의 물꼬를 텄던 1962년, 왁스만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의 일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첫 미국인이 되었다. 이때 코간이 그를 찾아와 오케스트라 악보를 부탁했고 이를 전달받은 코간은 후에 키릴 콘드라신의 지휘로 이 곡을 녹음했다. 코간은 빅토리아 뮬로바와 안드레이 코르사코프에게도 ‘카르멘 환상곡’을 가르쳤다. 소련 개방 이전에 망명길에 올랐던 뮬로바의 짐 속에는 마이크로 필름에 수록된 이 곡의 악보가 있었고 요절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코르사코프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이 곡을 녹음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은 작곡가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배 작, 편곡가들이 첼로와 오케스트라, 콘트라바스와 오케스트라, 트럼펫과 오케스트라, 비올라 솔로 및 비올라와 현악과 타악을 위한 편곡을 발표했다. 연주력 증명의 고난도 작품으로 하이페츠 시대 이후 이만한 곡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written by Pete Song

(주)피트뮤직 petemusic.org

Program Introduction

점과 선 시즌 2-9: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나의 사랑이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보다 이 밤을 더 아름답게 비추어 -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 Starry Night over the Rhone by Vincent van Gogh 1888
“나의 사랑이 저 하늘의 빛나는 별들보다 이 밤을 더 아름답게 번쩍이며 비추어” (3막 2장 – 라이샌더)

슈베르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Franz Peter Schubert(1797-1828): Fantasie in C major, D.934 (26 mins. / 1827)

I. Andante molto
II. Allegretto
III. Andantino
IV. Allegro vivace – Allegretto – Presto

이 곡이 초연된 1828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한 평론가는 초연 무대를 두고 “비엔나 사람들이 지적 추구에 바칠 수 있는 시간을 초과하는 길이의 작품이다. 공연장은 차츰 비워졌다. 작곡가 본인도 곡의 마무리에 대해 할 말이 없음을 실토해야 한다.”라고 썼다. 이 환상곡의 자유로운 형식은 3부 소나타 형식에 익숙해있던 당대의 청취자들에게 지나치게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또는 악평의 책임을 줄이려는 의도였는지 위의 평을 썼던 이는 자신도 마지막 악장까지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슈베르트는 제시-발전-재현이라는 변증법적 소나타 형식에서 벗어나 ‘선율-주제’란 덩어리를 연속으로 배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3악장 안단티노의 주로 쓰인 선율은 뤼케르트 시에 붙인 가곡 ‘내 인사를 받아주오’ D 741에서 가져온 것이다. 인사를 받아줘야 하는 ‘그대’는 더 이상 마주 앉아 얘기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존재다. 그런 까닭에 이 부분은 기묘하고 마법적인 감정의 상태에서 노래해야 하는데 주제가 여러 개의 변주로 확장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도 고조된다.

환상곡 D 934를 작곡했을 당시의 슈베르트 Franz Schubert Portrait by Gabor Melegh(1827)

전체적으로는 느리게-빠르게-느리게-빠르게의 전형적인 4악장 소나타 형식이나 안단테 몰토의 1악장과 알레그레토의 2악장을 한 악장으로 간주해 전체를 3악장 구조로 파악하기도 한다. 실제 연주는 악장 간의 쉼 없이 한 번에 진행된다. 귀 기울여 들으면 이 소나타엔 매우 많은 음이 등장하는 것을, 두 연주자 모두에게 엄청난 기교가 요청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편하게 들린다면 연주자의 기량이 그만큼 빼어나다는 것이다.

초연은 만족스럽지 못했어도 근 200년이 흐른 지금, 슈베르트의 환상곡은 주요 바이올린 레퍼토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 음악의 시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통찰력과 함께 명석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청중의 환상곡의 황홀한 감정으로 인도할 수 있다. 슈베르트의 음악 언어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여전히 매력적이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여도 그 속엔 측정할 수 없는 감정적 깊이가 있다. 이 환상곡의 정서는 슈베르트 가곡에서 자주 접하는 슬픔, 고통, 사색이 아니라 은은한 빛으로 발하는 낙관적 태도이다. 단순한 표면 아래 자리한 매우 복잡한 내면의 삶을 연주자는 포착해내야 한다. “간단한” 음악처럼 보이지만 정작 연주자들은 매우 높은 연주 기술의 소유자여야 한다. 쇼팽이 제 2의 파가니니라 칭했을 정도로 기교가 뛰어났던 요제프 슬라빅을 염두에 두고 이 곡이 씌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피아노 부분도 못지 않은 고난도임을 거장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말로 확인할 수 있다. “피아노를 위해 쓰여진 음악 중 가장 어렵습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한데 모아놓은 것보다 더 어렵다고요.”

슈만(편곡: 크라이슬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Robert Schumann(1810-1856): Phantasie in C major, Op. 131 arranged for violin and piano by Fritz Kreisler (15 mins. / 1853 / dedicated to Joseph Joachim)

엽서 속에 담긴 1853년의 슈만

이 곡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음악으로 쓴 러브레터이다. 슈만의 원곡은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었는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은 크라이슬러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인 슈만이지만 바이올린을 위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잊혀졌거나 심지어 작곡가 자신에 의해서 조차 무시되었다. 요제프 요아힘에게 헌정된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출판된 것도 그의 증손녀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낸 덕분이었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은 생전에 출판되기 했어도 오늘날까지 콘서트 프로그램에 잘 오르지 않는다. 녹음도 드문 편으로 그나마 크라이슬러에 의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버전이 좀 눈에 띌 뿐 오케스트라 버전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슈만 환상곡을 헌정받은 젊은 시절의 요제프 요아힘 Joseph Joachim

이 환상곡은 요아힘의 의뢰에 따라 만들어졌다. 초연은 슈만의 지휘와 요아힘의 연주로 1853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이듬해 1월, 요아힘은 다시 이 곡을 연주했고 같은 연주회에서 클라라 슈만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연주했다. 아마도 슈만이 절친 바이올리니스트와 아내의 연주를 본 마지막 순간이었을 것이다. 환상곡은 고전주의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곡가들이 즐겨 선택했던 낭만주의 시대의 전형적 악곡 스타일이었으며 슈만이 가장 좋아하는 형식이기도 했다. 이 환상곡은 일정 부분 소나타의 원리를 따라 A단조의 애절한 도입부로 시작해 바로 C장조의 명쾌한 주제가 나오고 이후 작품의 나머지 부분에 걸쳐 후렴처럼 반복된 후 종지부로 나아간다.

이 곡이 무시됐던 이유 중 하나는 슈만 말년의 작품들이 받았던 오해, 즉 작곡가의 정신적인 문제가 작품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선입견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 곡을 편곡한 이가 탁월한 선곡과 빼어난 작, 편곡 능력으로 수많은 명작을 남긴 크라이슬러였다는 점은 오해의 근거를 희박하게 한다. 자유롭고 유려하게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를 경험할 때 오해는 쉽게 불식된다. 

왁스만: 카르멘 환상곡

Franz Waxman(1906-1967): Carmen Fantasy (9 mins. / 1946 / dedicated to Jascha Heifetz)

영화 유모레스크의 포스터

1919년 ‘코스모폴리탄’지에 패니 허스트가 쓴 <유모레스크: 눈물을 머금고 짓는 웃음의 인생>이란 제목의 단편 소설이 실렸다. 짧게 플롯을 소개한다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걷는 젊은이와 세 번의 결혼에도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갈구하는 부인이 주인공으로, 우연한 기회에 만난 이들은 서로에게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짐작하겠지만 해피 엔딩은 아니다. 열정, 갈등, 저항, 위로가 뒤섞이다 파국의 종말을 맞는 격정의 멜로드라마다. 큰 인기를 얻은 소설은 이듬해 무성영화로 만들어졌으며 26년이 흐른 후 여전히 흑백이긴 하나 멋진 음악과 함께 리메이크되었다.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한 이 영화는 높은 찬사를 받았다. 헬렌 라이트 부인 역을 맡은 조앤 크로포드가 아름다운 외모와 깊은 감정 연기로 주목을 받았고 탄식과 절망의 비가를 유모레스크(유모레스크는 낭만주의의 한복판이었던 19세기에 널리 보급된 유머러스하면서도 극적인 감정 변화가 특징인 기악곡 형식이다. 슈만도 ‘웃음보다는 오히려 눈물겨운 곡’이라 했으니 유머에 방점을 두기 보다는 해학을 곁들인 비극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란 역설로 풀어낸 원작과 연출도 평단의 호평을 끌어냈다. 연기, 연출 못지 않게 이 영화를 유명하게 한 것은 바로 음악이다. 장본인은 음악감독 겸 작곡을 맡은 프란츠 왁스만이었다.

프란츠 왁스만 Franz Waxman

왁스만은 150편이 넘는 영화의 스코어를 작곡하며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계에서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활동했던 인물이다. 영화 <유모레스크>에는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로부터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트리스탄과 이졸데>),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까지 스무 곡 넘는 명곡이 등장한다. 스튜디오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원작들을 연주하는 것과 함께 왁스만은 비제와 바그너의 테마를 바탕으로 오리지널을 만들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남자 주인공의 천재성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엄청난 기교를 얹은 곡들이었다. 당초에는 콘서트, 방송, 영화를 주름잡던 당대의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으나 실제 연주는 아직 무명이었던 아이작 스턴이 맡았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영화평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음악은 실로 대단하다. 눈을 감고 가필드(극중 남주인공 폴 보레이를 연기)의 연주 장면을 듣는다면 훨씬 깊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클로즈업 장면에 나오는 손은 그의 것이 아니다. 실제 그 손가락은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전문 바이올리니스트의 것이다. 매우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연주다.” 사라사테 버전이 아닌 왁스만의 ‘카르멘 환상곡’은 이렇게 탄생했다.

카르멘 환상곡을 헌정받은 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나중에 영화를 본 하이페츠는 ‘카르멘 환상곡’을 라디오 연주회용으로 편곡을 해 달라고 왁스만에게 부탁했다. 오케스트라 파트가 확장된 작품의 초연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하이페츠는 이 곡으로 세계 투어를 했고 녹음까지 했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당시 제자였던 레오니드 코간에게 이 레코드를 전했다. 큰 감동을 받고 연주까지 하고 싶었던 그는 냉전 상황에서 악보를 구할 수 없자 음반을 들으며 일일이 채보했다. 문화 부문에서나마 미국과 소련이 조금씩 교류의 물꼬를 텄던 1962년, 왁스만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키이우의 일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첫 미국인이 되었다. 이때 코간이 그를 찾아와 오케스트라 악보를 부탁했고 이를 전달받은 코간은 후에 키릴 콘드라신의 지휘로 이 곡을 녹음했다. 코간은 빅토리아 뮬로바와 안드레이 코르사코프에게도 ‘카르멘 환상곡’을 가르쳤다. 소련 개방 이전에 망명길에 올랐던 뮬로바의 짐 속에는 마이크로 필름에 수록된 이 곡의 악보가 있었고 요절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코르사코프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이 곡을 녹음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편곡은 작곡가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배 작, 편곡가들이 첼로와 오케스트라, 콘트라바스와 오케스트라, 트럼펫과 오케스트라, 비올라 솔로 및 비올라와 현악과 타악을 위한 편곡을 발표했다. 연주력 증명의 고난도 작품으로 하이페츠 시대 이후 이만한 곡은 없다는 게 중론이다.

written by Pete Song

(주)피트뮤직 petemusic.org